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테쿰세 셔먼 (문단 편집) === 전후 행적 === || [[파일:말년의 셔먼.jpg|width=250]] || || 말년의 셔먼 || 남북전쟁 이후 셔먼은 중장으로 진급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율리시스 S. 그랜트]]는 그를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육군대장으로 진급시키고 총사령관의 자리에 올렸으며, 셔먼은 그 후 64세에 은퇴할 때까지 15년간 그 자리를 유지했다. 이후 남북전쟁에 관해 그가 쓴 회고록은 명저로 평가받아 문인으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편지 쓰기를 좋아해 거의 평생, 전쟁중에도 매일 편지 여러 장을 쓰고 받았기에 필력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은퇴 후 셔먼은 정계 진출을 권유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조용히 살았다. [[18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제임스 G. 블레인]] 국무장관에게 대선에 출마하는게 어떠냐는 제안도 받았는데 스스로 거절했고, 대신 블레인이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블레인은 계파 싸움의 영향 때문에 유력 후보였음에도 대통령 후보 지명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그래서 당 계파를 초월해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테쿰세 셔먼을 추천한 것이었다.] 만약 이때 출마해 당선되었다면 [[율리시스 S. 그랜트]] 이후 또다시 나온 남북전쟁 전쟁영웅 대통령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은퇴한지 7년이 되던 1891년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장례식 때는 남북전쟁 당시 적수였던 남부 육군의 조셉 존스턴도 참석했는데, 비가 오는 추운 날인데도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모자를 벗고 있었다.[* 참고로 존스턴이 10살 이상 나이가 더 많은 삼촌뻘이었다. 웨스트포인트 졸업 기준으로 하면 10기 이상 차이 나는 대선배인 것이다.] 존스턴의 친구가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 모자를 쓰라고 권유하자 존스턴은 '만약 내가 관 속에 있고 빌리(윌리엄의 애칭으로 셔먼을 말한다)가 자리에 있었다면 빌리 역시 모자를 벗고 있었을 것'이라고 답하였다.[* 전쟁 이후 자주 서신을 주고 받았고, 존스턴이 [[워싱턴 D.C.]]로 여행 올 때마다 저녁 식사를 통해 서로 만날 정도로 친했다고 한다. 남북전쟁이 한 식구끼리 갈라져 싸웠다가 다시 합쳐진 전쟁이라 적이지만 우정을 나눈 사례가 꽤 있다. 존스턴과 셔먼 못지 않게 유명한 일화가 게티즈버그에서 피켓의 돌격을 지휘한 여단장 중 한명이었던 루이스 아미스테드 준장과 그 돌격을 저지한 북군 2군단장 윈필드 핸콕 소장의 우정.] 그 때문에 존스턴은 폐렴에 걸려서 10일 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으나, 실제로 당시 조셉 존스턴이 폐렴을 투병하긴 했어도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존스턴은 팔순을 넘긴 고령이었다. 가족으로는 아내 엘레노어와 8명의 자녀, 11명의 형제들이 있다. [[리델 하트]]와 같은 전사가에게 '최초의 현대적 장군'이라는 평을 받았다. [[총력전]](Total War)의 선구자로 칭송받기도 한다. 휘하 육군 장병들은 그를 '[[빌리]] 아저씨'라 불렀다고 한다. 빌리는 셔먼의 이름인 '윌리엄'의 애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